6조 원 반도체 사업, '정치적 보은'에 가려진 전문성
[기자수첩] 6조 원 반도체 사업, '정치적 보은'에 가려진 전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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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형성
국민 혈세 6조 원 앞에 지역 안배와 정치적 보은, 그리고 진영의 명분이 전문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 지형을 바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무려 6조 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 반도체는 단순히 공장 몇 개를 짓는 사업이 아니다. 전력 계통 연계, 초순수 용수 확보, 도로·철도 등 인프라, 첨단 장비 조달, 글로벌 공급망 정합성, 그리고 R&D와 핵심 전문인력 수급까지 국가의 산업 역량이 총동원돼야 하는 초대형 전략 프로젝트다.
그런데 정작 이 막대한 예산의 타당성을 심의하는 위원회의 산업 분야 민간위원 명단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정형외과 전문의 출신인 이근배 전남대 총장, 그리고 과거 민형배 시장의 선거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세를 도왔던 정치적 인사이더로 알려진 인물과 디저트 카페 대표 등이 나란히 '산업 분야' 민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전남·광주 지역이 막대한 정부 예산의 수혜를 입는 첨단산업 심의 기구임에도, 반도체 공정이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공학적 타당성을 검증해 온 정통 기술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 자리를 정부와 민형배 시장 측의 정치적 인연이나 보은성 인사로 채웠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사회적 경험과 각 분야의 전문성을 폄훼할 이유는 없다. 이근배 총장이 이끄는 전남대 등 지역 거점 대학의 역할이나 청년 창업의 현장을 경험한 이들의 노고 역시 소중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인적 역량이 아니라 '자리의 성격'이다. 대학 경영이나 식음료 창업 지원, 정치적 선거 지원을 논하는 자리와, 국가 반도체 산업의 기술적 타당성 및 수조 원대 재정 투입의 효율성을 심의하는 자리는 요구되는 멘탈 모형과 지식 체계가 엄연히 다르다. 정치적 공헌도가 전문성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위원 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가 2027년부터 4년간 매년 1조 5000억 원씩 총 6조 원을 지원하겠다는 로드맵을 내놓았다. 하지만 산업기반시설(SOC) 조성에 1조 원, 기업 지원에 2000억 원, R&D 및 산업생태계 육성에 2000억 원, 전문인력 양성에 700억 원 등을 배정했다는 거시적 항목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사업 타당성 평가(Feasibility Study)나 항목별 산출근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사업의 실체적 청사진도, 세부 코스트 모델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심의하고 필터링할 위원회의 전문성마저 낙하산식·보은성 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전남·광주 지역민과 전국의 납세자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책정한 도대체 어떤 비용-편익 분석(B/C)을 근거로 6조 원을 편성했으며, 민형배 시장의 선거 공신이나 비전문가들이 과연 무슨 기준으로 그 재정 투입의 성패를 검증한다는 것인가.
정부는 소관 부처 관계자와 전력·에너지 분야 정부위원이 참여하기 때문에 관료 조직을 통해 전문성이 보완된다는 입장이다. 민간위원의 다양성과 지역 대표성도 고려했다고 해명한다. 반도체 전문가 위촉이 법적 강제 요건은 아니라는 해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법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 아니라는 말이 곧 정책적 타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정편의주의적 합법성 뒤에 숨어 납세자의 합리적인 검증 요구를 외면하는 모양새다. 정부가 사업 기획안을 올리고 내부 정부위원이 이를 심의하는 구조라면, 독립된 외부 민간 전문가의 크로스체크(Cross-check) 기능은 더욱 절대적이다.
국회예산정책처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수석전문위원까지 일제히 반도체 전문가 부재와 전문성 보완 필요성을 지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역균형발전을 향한 정책적 의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산업과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지역 자생적 성장 동력을 구축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전남과 광주가 거대한 국가 예산의 수혜를 받아 첨단산업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 자체를 탓할 이는 없다.
그러나 지역균형발전과 정치적 명분이 모든 정책적 허점과 부실 검증, 그리고 코드 인사 논란을 덮어주는 무적의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사업일수록, 수도권과의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명분이 클수록 사업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경제적 파급효과는 더욱 엄격한 잣대로 검증받아야 한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국가 재정에 대한 책임은 대립하지 않는다. 철저한 타당성 검증과 투명한 예산 집행만이 전남·광주 지역에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안겨주는 유일한 길이다.
정치적 구호만으로는 반도체 웨이퍼 한 장도 찍어낼 수 없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력공급 용량(MW), 하루 공업용수 수급량(톤), 패키징 및 파운드리 공급망 연계성이라는 냉혹한 공학적 현실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국가 전략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정부와 민형배 시장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제시하지 못하고 심의기구의 전문성 및 선거 보은 논란마저 해소하지 못한다면, 시장과 지역 사회는 이 사업을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딥테크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치적 수사와 진영 논리를 위한 '이벤트성 예산'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6조 원은 정부의 쌈짓돈도, 특정 정치 세력의 선거 품앗이를 위한 소모품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판을 '지역발전 발목잡기'로 치부하는 소모적 공방이 아니다. 반도체 공학과 공급망을 제대로 진단할 정통 전문가를 심의에 합류시키고, 사업별 예산의 마이크로 단위 산출근거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사후 성과 평가와 재정 집행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기대와 막대한 세금이 걸린 시험대 위에서, 이제 정부와 민형배 시장이 침묵을 깨고 그 타당성을 증명할 차례다.